기획연재

랜드마크로 알아보는 세계사 ① 콜로세움

작성자
송 민서
작성일
2023-01-31 23:51
조회
127

▲ 콜로세움

 

  랜드마크는 본래 여행자들이 어느 지역을 여행할 때 처음 있었던 장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시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더욱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는 건물이나 조형물 등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랜드마크라고 부른다.

 

  지역들 대표하는 상징물인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지역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 때문에 해당 국가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번 기사에서는 콜로세움을 시작으로 지역을 넘어 각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랜드마크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의 로마에 위치한 건축물로, 고대 로마 시대에 건축되었다.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지로서 탈바꿈했지만, 원래는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었다.

 


▲ 콜로세움 내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콜로세움은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 3층은 코린트 양식 열주이며, 그리스ㆍ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 총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4층은 관객석이 아니라 천막 고정 장치를 지탱하는 벽으로 설계되었다. 이 천막 고정 장치는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서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시설까지 갖춘 셈이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이나 동물 사냥, 신화를 재연하는 연극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콜로세움도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에 이르러 로마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로마가 점차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를 이기지 못하고 요새나 교회와 같은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진과 약탈, 채석 등의 파괴로 인하여 2,0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상당 부분이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콜로세움이 설계되기도 한참 전, 아주 까마득한 옛 고대 로마에서는 현재 콜로세움이 자리한 곳이 주거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대화재가 일어나면서 그 지역에 있던 건물들이 모조리 불에 타자 당시 황제였던 네로 황제(재위 54년~68년)는 그곳에 거대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을 짓기 시작했다. 궁전 주위에는 인공 호수와 정원들을 지었으며, 막대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수로 또한 상당수 개조되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폭정이 심해지면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 이후 차례로 즉위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모두 내전에서 살해당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하여 황제라는 높은 자리와는 관련이 없을 것만 같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게 되었다.

 


▲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근교에 위치한 평범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니었으며, 평생을 군인으로서 전쟁터를 누비면서 살았다. 그 탓에 귀족들로 대부분 이루어진 원로원으로부터 호평을 끌어내기는 어렵고, 반발을 끌어내기는 쉬운 위치였다.

 

  전통적인 혈통을 이어받지 않은 자가 황제로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내전 중 소실된 유피테르 신전을 복원하거나 도로를 정비하고 공공건물을 건설하는 등 각종 공공사업을 실시하였다. 도시 한복판에 대형 경기장을 건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또한 그 사업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설계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본디 시민들의 주거 지역이었던, 네로 황제가 황금 궁전을 지었던 그곳을 원형극장 건설 부지로 선택했다. 이는 비록 불에 타 황폐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이 주거 공간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런 곳을 자신의 사치를 위한 황금 궁전으로 이용하려던 네로 황제와는 달리, 자신은 시민들의 즐거움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건설 부지를 확정지은 베스파시아누스는 황금 궁전과 인근 땅을 모두 사들인 후 70년~72년 사이 착공에 들어갔다. 원형 극장을 건설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즉위 직전 치러졌던 유대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콜로세움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을 바탕으로 새 원형극장을 짓도록 명령했다.”라는 내용이 나왔다.

 

  하지만 끝내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79년 세상을 떠났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공사를 완성한 것은 큰아들인 티투스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숨진 이듬해인 80년, 드디어 원형극장이 완공되었으며, 이후 검투사나 동물 등이 이동하는 지하 공간인 히포지움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콜로세움이 개장했을 때의 이름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었다. 이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는 뜻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가문의 성인 플라비우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현대에 흔히 알려진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11세기 무렵 등장했다.

 


▲ 콜로세움을 찾은 관광객들

 

  현재 콜로세움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을 만큼 인기 있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웅장한 외관과 고대 로마 제국의 원형 경기장이라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탓이다. 그러나 기원을 따라가보면 정치적 목적이 곳곳에 숨어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콜로세움에는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신분제를 일깨우는 역할도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콜로세움의 관중석은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곳, 1층에 황제와 원로원 의원이 관람할 수 있도록 대리석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다른 관중석 또한 부자, 중산층, 평민, 노예 등 신분에 따라 자리가 나뉘어있었다. 게다가 입석 또한 존재했는데, 가장 꼭대기 층에는 좌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매우 가난한 이들이나 여성들은 이곳을 이용해야 했다. 모두가 즐기는 공간인 동시에 신분제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한 셈이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콜로세움에 대해 살펴보았다. 외관만 보면 그저 멋있는 건축물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라와 도시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번 기사를 통해 로마에 갔을 때 콜로세움을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역사적인 시각으로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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