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로 알아보는 세계사 ② 타지마할
작성자
송민서
작성일
2023-02-08 05:16
조회
93

▲ 타지마할
지난 기사에서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콜로세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인도의 대표 건축물 타지마할과 이와 관련된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타지마할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타지마할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아름다운 외관을 보고 이것이 무덤이라는 상상을 전혀 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타지마할은 ‘황궁의 관’이라는 뜻의 무덤이다. 무굴 제국 시절 황제 샤 자한이 부인을 기리기 위해 건축하였으며, 완공에만 총 22년의 세월이 걸렸다. 샤 자한의 부인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난 지 6개월이 되던 1632년 무덤 건축을 명하였고, 1654년 완공되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타지마할은 당시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2007년에는 스위스 ‘신 7대 불가사의 재단’에서 콜로세움, 만리장성 등 세계적인 건축물들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혔고, 2002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타지마할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 타지마할을 찾은 관광객들
세계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인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우뚝 선 타지마할은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유네스코 조사 결과 연평균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타지마할을 찾고 있으며, 특히 2014년에는 700~8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기후가 선선한 10월, 11월, 2월에는 더욱더 타지마할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터키, 인도 및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그중에서도 주로 페르시아 양식과 초기 무굴 양식이 잘 조합되어 있는데, 전체 구조는 티무르 제국 시대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순백색의 대리석과 각종 보석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외관이 더해지니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우 대칭이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는 것도 타지마할의 특징이다. 타지마할의 발코니들과 아이완(페르시아 양식의 아치형 입구)들은 어느 방면에서 바라보든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 샤 자한
타지마할의 입구에 들어서면 1층 한가운데에 뭄타즈 마할이 묻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샤 자한의 무덤이 있는데, 실제 시신이 묻혀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왕과 왕비의 실제 시신은 건물 지하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타지마할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1612년 혼인 서약을 맺은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약 20년 가까이 이어진 부부 생활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을 정치적으로도 신뢰하여 국정을 함께 논의하고, 중요 문서에 인장을 찍는 일을 위임하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전쟁터에도 함께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

▲ 뭄타즈 마할
그러던 1631년 6월 17일, 여느 때와 같이 샤 자한과 함께 인도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뭄타즈 마할은 출산 후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만다. 당시 딸은 건강하게 출산하였지만, 30여 시간의 산고 끝에 출혈이 너무 많았던 뭄타즈 마할은 “나를 기억할 무덤을 지어 1년에 한 번은 찾아와달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이후 원정에서 돌아온 샤 자한은 사랑하는 아내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무덤을 짓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세계 각지에서 최고의 기술자를 불러 모았으며, 최고급 자재를 들여와 건축을 명했다. 약 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된 끝에 11년 만에 무덤이 완공되었으며, 정원과 부대시설까지 지어져 현재 우리가 아는 타지마할의 모습이 완성되기까지는 22년이 걸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타지마할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건축물이다. 하지만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이 아닌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상황은 역전된다.
당시 타지마할을 건축하는 데는 유럽과 아시아 등에서 공수해 온 최고급 자재들과 보석들이 사용되었으며, 건축물은 모두 순백색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이를 설계하는 데 동원된 기술자들과 2만 명에 달하는 인부들의 인력까지 생각한다면 타지마할 하나를 짓는 데 얼마나 많은 국고가 들었을지는 뻔하다. 총공사비만 당대 기준으로 3,200만 루피, 현재 가치로 약 9억 달러가 들어갔다.
당장 뭄타즈 마할이 죽기 불과 1년 전인 1630년만 하더라도 남부 지역에서 200만 명이 아사하는 대기근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국가적으로 시민들을 지원하거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 무삼만 버즈
결국 무술 제국은 재정난으로 인해 대혼란을 맞이한다. 샤 자한의 아들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샤 자한은 불명예스럽게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다. 또한,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포로의 탑’이라는 뜻의 무삼만 버즈에 갇힌다. 타지마할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658년부터 8년간 유폐된 샤 자한은 죽는 날까지 타지마할을 내려다보며 생애를 보냈다고 한다.
샤 자한은 1666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타지마할로 옮겨져 아내 옆에 묻혔다. 이로써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관은 모든 게 완벽한 대칭으로 설계된 타지마할에서 유일하게 대칭이 아닌 구조물이 되었다.

▲ 아그라 성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깊이 알아볼수록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이야기, 이로 인한 국가 재정 파탄을 비롯하여 완벽한 대칭에 대한 불가사의와 설계 이유 등 많은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정설로 확인된 역사적 사실 외에도 다양한 가설과 추측들이 무성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속설은 블랙 마할과 인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블랙 마할은 말 그대로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아그라 궁전에서 타지마할을 내려다보던 샤 자한이 순백색의 타지마할과 대비되는 흑색의 대리석으로 같은 규모의 블랙 마할을 지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타지마할 공사가 끝난 이후 더이상 이와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지 않게끔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속설도 많이 퍼져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속설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타지마할과 그를 둘러싼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타지마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다 보면, 역사는 어느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는 능력을 함양하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7
https://www.google.co.kr/am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Amp.html%3fidxno=519048
https://www.google.co.kr/amp/s/news.sbs.co.kr/amp/news.amp%3fnews_id=N100437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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