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7) 제주 4.3 사건
2021년
4월
작성자
손 예진
작성일
2023-01-02 03:58
조회
5
매년 4월이 다가오면 상기되는 여러 역사적 사건, 사고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제주 4.3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 사건은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1947년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했던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은 총을 발포했다. 이때 민간인 6명이 희생되고 8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생긴 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의 발달이자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 후 3월 5일 경찰의 발포에 대한 사과 등을 요구하며 ‘제주도 3.1 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월 10일부터 민, 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의 4만 1,211명이 파업에 가세했다.
3.1 사건 당시 유엔에서 내린 단독 선거 진행이라는 결정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군경과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제주도에서도 시위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그러나 도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오히려 미 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파업 주도 세력을 비롯한 약 2,500명을 무차별로 검거하여 고문했다. 또한, 2,500여 명 중 250명을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이로써 총파업은 종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강경책은 지속되었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극우파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돌리며 미군 축출과 경찰 타도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미 군정은 8월 15일 도민들을 대대적인 검거를 시행해 투옥시켰다. 검거를 피하기 위해 수십 명의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도피하자 도민들도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를 추진했고, 이에 좌파 세력은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이를 빌미로 전국적으로 2.7 투쟁이 전개되어 미군정은 제주도민에게 집중적 공세를 가했다.
이로 인해 1948년 4월 3일 자정에 제주도에서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자위대’라는 제주도민의 무장전위대가 도내 11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였고, 이를 시발점으로 경찰, 서북청년단의 숙소와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관공리 집을 공격했다. 당시 ‘자위대’에는 약 350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도내 경찰지서는 약 20곳이었다.
무장세력인 ‘자위대’는 초기 공세에 성공하면서 도민과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개편을 진행하기 위해 해체한 뒤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로 조직화했다. ‘인민유격대’는 연대와 소대로 구분되어 ‘자위대’보다 체계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무장세력의 공격 성공과 ‘인민유격대’의 수립으로 위협을 느끼게 된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을 내려 병력을 증강했고,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강화하였다. 더 나아가 미 군정은 9연대장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익렬의 거부로 인해 유격대에 협상을 명령했다.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미군정정관은 평화협상을 거부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 조작하였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이 해임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었다.
분노한 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다가올 5월 10일 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투쟁을 시작했고, 선거 당일 3개 선거구 중 두 곳이 무효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미국과 정부의 반응은 폭력적이었다. 1949년 3월 2일 미국은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으며,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인 3월 12일부터 4월 12일 한 달 동안 유격대의 2,345명이 사상했고, 민간인 1,608명이 살해당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희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군 작전지휘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미군은 계속해서 제주도에 경찰들을 파견했으며, 결국 12월까지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심지어 11월 군경 토벌대가 제주 주민 30명을 총살했던 사건을 시작으로 마을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해당 작전은 3개월 동안 지속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에 계엄을 선포했었다가 12월 31일에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생겼으며, 그 이후인 1954년까지 무장토벌대와 인민유격대는 계속해서 충돌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대인 2000년에는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으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제주 4.3 사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제주 4.3 사건을 추모하는 추념식에 방문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로 12년 만에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한 사례이다. 이어 문 대통령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대통령으로서 사과한다.”고 언급하며,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촉구했다.
봄이 다가오는 4월 제주도는 성수기에 달한다. 제주도에 방문하게 된다면 제주 4.3 사건을 추모하는 공간을 들르는 것을 추천한다. 위령탑, 위령제단, 평화기념관 등이 있다. 평화기념관에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공간으로 제주 4.3 사건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실, 자료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의 입구는 동굴 터널로 장식되어있으며, 동굴을 지나면 비문이 없는 하얀 비석이 누워있다.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에 누워있는 비석은 세워지고 비문도 채워질 것이라고 한다.
70여 년 전에 있었던 제주도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희생자가 있는 아픈 역사는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 제주 4.3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희생자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그날을 그리며 추모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지 출처
http://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192
https://www.nocutnews.co.kr/news/5526408
http://psnews.co.kr/View.aspx?No=1533389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2281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21667
▲ 왼쪽부터 제9연대 송요찬 연대장,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1947년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했던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은 총을 발포했다. 이때 민간인 6명이 희생되고 8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생긴 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의 발달이자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 후 3월 5일 경찰의 발포에 대한 사과 등을 요구하며 ‘제주도 3.1 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월 10일부터 민, 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의 4만 1,211명이 파업에 가세했다.
3.1 사건 당시 유엔에서 내린 단독 선거 진행이라는 결정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군경과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제주도에서도 시위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그러나 도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오히려 미 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파업 주도 세력을 비롯한 약 2,500명을 무차별로 검거하여 고문했다. 또한, 2,500여 명 중 250명을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이로써 총파업은 종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강경책은 지속되었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극우파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돌리며 미군 축출과 경찰 타도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미 군정은 8월 15일 도민들을 대대적인 검거를 시행해 투옥시켰다. 검거를 피하기 위해 수십 명의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도피하자 도민들도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했다.
▲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유해
당시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를 추진했고, 이에 좌파 세력은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이를 빌미로 전국적으로 2.7 투쟁이 전개되어 미군정은 제주도민에게 집중적 공세를 가했다.
이로 인해 1948년 4월 3일 자정에 제주도에서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자위대’라는 제주도민의 무장전위대가 도내 11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였고, 이를 시발점으로 경찰, 서북청년단의 숙소와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관공리 집을 공격했다. 당시 ‘자위대’에는 약 350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도내 경찰지서는 약 20곳이었다.
무장세력인 ‘자위대’는 초기 공세에 성공하면서 도민과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개편을 진행하기 위해 해체한 뒤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로 조직화했다. ‘인민유격대’는 연대와 소대로 구분되어 ‘자위대’보다 체계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무장세력의 공격 성공과 ‘인민유격대’의 수립으로 위협을 느끼게 된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을 내려 병력을 증강했고,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강화하였다. 더 나아가 미 군정은 9연대장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익렬의 거부로 인해 유격대에 협상을 명령했다.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미군정정관은 평화협상을 거부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 조작하였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이 해임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었다.
▲ 희생자 위령단
분노한 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다가올 5월 10일 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투쟁을 시작했고, 선거 당일 3개 선거구 중 두 곳이 무효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미국과 정부의 반응은 폭력적이었다. 1949년 3월 2일 미국은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으며,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인 3월 12일부터 4월 12일 한 달 동안 유격대의 2,345명이 사상했고, 민간인 1,608명이 살해당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희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군 작전지휘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미군은 계속해서 제주도에 경찰들을 파견했으며, 결국 12월까지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심지어 11월 군경 토벌대가 제주 주민 30명을 총살했던 사건을 시작으로 마을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해당 작전은 3개월 동안 지속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에 계엄을 선포했었다가 12월 31일에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생겼으며, 그 이후인 1954년까지 무장토벌대와 인민유격대는 계속해서 충돌하였다.
▲ 제주 4.3 특별법 개정안 처리를 위한 공청회
김대중 정부 시대인 2000년에는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으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제주 4.3 사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제주 4.3 사건을 추모하는 추념식에 방문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로 12년 만에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한 사례이다. 이어 문 대통령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대통령으로서 사과한다.”고 언급하며,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촉구했다.
▲ 제주 4.3 평화기념관
봄이 다가오는 4월 제주도는 성수기에 달한다. 제주도에 방문하게 된다면 제주 4.3 사건을 추모하는 공간을 들르는 것을 추천한다. 위령탑, 위령제단, 평화기념관 등이 있다. 평화기념관에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공간으로 제주 4.3 사건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실, 자료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의 입구는 동굴 터널로 장식되어있으며, 동굴을 지나면 비문이 없는 하얀 비석이 누워있다.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에 누워있는 비석은 세워지고 비문도 채워질 것이라고 한다.
70여 년 전에 있었던 제주도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희생자가 있는 아픈 역사는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 제주 4.3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희생자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그날을 그리며 추모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지 출처
http://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192
https://www.nocutnews.co.kr/news/5526408
http://psnews.co.kr/View.aspx?No=1533389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2281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2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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