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로 알아보는 세계사 ④ 베르사유 궁전
작성자
송민서
작성일
2023-02-21 19:17
조회
41

▲ 베르사유 궁전
지난 기사에서는 세계적인 랜드마크 콜로세움과 타지마할, 만리장성과 이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과 이를 둘러싼 이야기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외관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프랑스 도심 외곽에 있음에도 오직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기 위해 베르사유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많다.
베르사유 궁전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데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외관의 영향이 크다. 바로크 양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당시 막대한 양의 재화와 수많은 인부, 최고의 건축가가 투입되었다. 건축가 루이 르 보가 설계를 맡았으며, 그가 사망하자 아르두앵 망사르가 뒤를 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단순히 궁전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 탄생하였다.

▲ 거울의 방
궁전과 정원을 합한 전체 면적이 약 800만m2로, 우리나라 대표 궁인 경복궁의 약 18배에 달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히 크기만 웅장한 것이 아니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2,000개가 넘는 방이 있다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거울의 방’만 봐도 알 수 있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모두 거울로 장식된 길이 73m의 방이다. 한눈에 봐도 화려한 외관과 거울의 행렬이 독특해 이목을 끈다. 엄청난 길이 탓에 방이라기보다는 복도에 가까운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 원래 이름은 ‘거울의 복도’이다.
하지만 거울의 방이 많은 이의 발길을 끌어낸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외관 탓만은 아니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아름다운 순간 외에도 감춰진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제국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바로 이 거울의 방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완승을 한 후 정치적 연극을 고안한 독일은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 이후 1919년 6월 28일 같은 공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종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거울의 방 하나만으로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 양식이 뛰어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건물의 길이가 500m 이상일 정도로 건물 자체의 크기도 엄청난 베르사유 궁전이지만, 그보다 더 큰 정원이 궁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정원에는 루이 14세의 별궁이었던 ‘대 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여러 개 있으며,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십자형 대운하가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막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만큼 걸어서 정원 전체를 둘러보기는 무리다. 그 때문에 관광 시에는 프티트레인(미니 기차)이나 버기카(전통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버기카를 대여할 경우 직접 운전해야 하기에 국제 운전면허증을 소지해야 한다는 유의점이 있어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프티트레인을 더욱 선호하곤 한다.

▲ 베르사유 궁전 완공 직후 모습
베르사유 궁전은 호화의 상징인 여러 궁전 중에서도 화려함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렇다면 이 초호화 궁전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흔히 베르사유 궁전 하면 ‘태양왕’이라는 수식어로도 불리던 루이 14세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베르사유에 처음으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 루이 13세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보통 생각하는 궁전의 개념이 아니라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이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루이 13세가 세상을 떠난 후 방치되던 이곳은 어느 날 루이 14세의 눈에 띄어 탈바꿈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루이 14세는 궁전을 짓는 약 50년의 기간 동안 매년 약 2만 5천 명에서 3만 6천 명 규모의 인부를 동원했다고 한다.

▲ 루이 14세 동상
루이 14세가 이토록 독보적인 궁전을 짓고 싶어 한 데는 절대왕정을 향한 욕심이 있었다. 루이 14세 초기에는 권력 약화에 앙심을 품은 귀족들이 궁전을 기습하여 반란을 꾀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당시 프랑스 왕실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왕권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기엔 충분했다. 루이 14세하면 떠오르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만 봐도 그가 얼마나 절대적인 왕권을 염원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수도를 베르사유로 옮기면서 국가의 중심을 새롭게 설정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이전보다 와해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또한, 왕실 행사를 꾸준하게 기획하고 귀족들의 참여를 의무화하여 직접 그들을 관리했고, 그 결과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 왕권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된다.

▲ 베르사유 궁전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만큼 베르사유 궁전에는 아픈 역사 또한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불전쟁에서 패한 이후 독일제국의 황제 즉위식을 이곳에서 치른 것도 있지만, 이외에도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싼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국민들의 희생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지난 기사에서 살펴보았던 랜드마크들과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궁전 또한 화려한 외관 이면에는 국민들의 고통이 자리한다. 엄청난 규모와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을 자랑하는 만큼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의 숫자 또한 막대하다. 왕을 위한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국민이 고된 노역에 투입되어야만 했고, 당시에는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 또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루이 14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하니,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들의 눈물로 이룩한 사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이 왕의 거처가 된 지 약 100년이 지난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왕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쫓겨난다. 이 사건이 바로 베르사유 행진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 여성을 중심으로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면서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가를 파리로 귀환하게끔 압력을 가한 사건이다. 일명 ‘시월 사건’, ‘시월 행진’이라고도 불린다. 베르사유 행진으로 파리로 귀환한 왕실에 따라 베르사유 궁전은 자연스레 방치되었으며, 이후 한참을 쓰이지 않다가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아름다운 전경을 통한 전율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많은 가치를 지닌 곳이다. 호화로운 건축물을 짓기까지 국민들의 많은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화려함 뒤에 가려진 여러 사건이 존재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미래 산업에 주목하고 있는 지금, 지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가치를 깨닫는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gle.co.kr/amp/s/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3fCNTN_CD=A0002295421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703171698325990?t=20230220025653
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010711091503282
https://www.google.co.kr/amp/www.ggilbo.com/news/articleViewAmp.html%3fidxno=809755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58859#link_guide_20160413124404_9759
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112310012571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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